하나의 대의를 향하는
‘팀워크’보다
각자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팀플레이’
“시니컬한 상냥함. 뾰족하고 괴상하지만 짜릿하고 부드러운 위로.” 팬들이 남긴 감상평에는 유난히 상반된 단어가 공존한다. 한 마디로 규정짓긴 어렵지만 뚜렷한 해상도를 지닌 밴드 실리카겔은 자유롭게 개인 작업을 하면서 밴드로서는 더 단단하게 뭉친다. 군대로 인한 공백기 이후 새로운 팬들을 유입시키며 새 챕터를 열어가고 있는 이들은 최근에는 패션 브랜드 산산기어와 함께 아예 신곡인 ‘Mercurial’을 테마로 한 컬렉션을 드랍하며 새롭고 용감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팝업 스토어 앞에 수백 명을 줄 세우고, 4월 단독 공연 티켓을 1 초 만에 매진시키며 지금 가장 뜨겁게 주목받고 있는 밴드 실리카겔의 협업 방식을 들여다봤다. 마치 화학식 구조처럼 밴드라는 모듈에 경계와 한계 없이 다양한 작업자와 ‘합성’하며 밴드의 세계관을 넓혀나가는 과정에는 진중함과 경쾌함이 동시에 돋보였다.
Interview | 정혜윤 · 손꼽힌, Editㅣ정혜윤, Photo | Mario Chui(@69.chui)
실리카겔
Photo: Mario Chui(@69.c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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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alohayoon
독립한 마케터이자 작가. 10년 동안 여섯 곳에 소속돼 다양한 일을 했지만, 줄곧 브랜드 마케터로 일했다. 지난 커리어는 음악, 크리에이티브, 카피라이팅, 문화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된다. 지난 경험들을 기반으로 2020년부터 프리랜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다능인 커뮤니티 SIDE.와 브랜딩 &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SIDE.Collective를 운영하고 있다.
손꼽힌 @kphnsohn
부티크 브랜딩 에이전시 Hearty Handy의 에이전트로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미디어, 부동산, 정치, 블록체인, 대체육 등 대안적인 흐름을 만드는 회사들의 브랜드 전략 및 마케팅 캠페인을 담당하고 있다. 새로운 사람과 공간을 만나는 일을 좋아하며 음악이 없는 시간은 쉽게 따분해한다. 소규모 공연장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실리카겔이라는 모듈
— 2년 연속으로 최우수 모던록 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벌써 데뷔한 지 8년이에요. 학교/동네 친구들로 모여서 첫 정규 앨범으로 신인상을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돌이켜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웅희: 하루마다 바뀌어요. 상 받았을 때는 우리가 뭔가를 만들고 있다는 실감이 났는데 평소에는 딱히 그런 생각은 안 들고 계속 진행 중이란 생각이 들어요.
춘추: 돌이켜보면 실리카겔만 한 건 아니더라고요. 실리카겔이 본진이라고 생각하지만, 각자 성장을 해왔고 그러면서도 밴드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어요. 어느덧 8년이 흘렀네요.
— ‘본진’이라는 표현도 재밌네요. 실리카겔은 개인 작업도 활발히 하는 밴드잖아요. 밴드 소개에 ‘실리카겔은 팀워크(Teamwork)보다 팀플레이(Teamplay)를 지향한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의 대의를 향해서 가는 팀워크가 아니라 각자의 구성원이 자유롭게 재능 발휘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물”이라고요. 실리카겔의 협업방식은 어떤가요?
한주: 상황마다 퍼포먼스가 좋은 멤버가 있어요. 예컨대 사운드 엔지니어링은 춘추가 스페셜리스트고, 지금 저희 신곡 ‘리얼라이즈' 뮤직비디오는 웅희가 감독 역할이거든요. 각자 강점에 따라 조금 더 튀어나오는 역할을 할 때가 있는데 나머지 멤버들이 그 상황에서 서포트해 주는 편이에요.
춘추: 음악을 만들 때는 곡마다 다른 방식을 적용해요. 누군가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어느 정도의 골조를 만들어 둔 상태에서 각자의 연주나 색깔이 들어가면서 만들어지는 것도 있고, 짤막한 모티브나 아이디어를 가지고 함께 디벨롭하는 경우도 있어요. 곡을 쓰고 현실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실리카겔화되는 과정을 거쳐요.
Photo: Mario Chui(@69.chui)
— 요즘 <일놀놀일>*이라는 책도 나오고, 워라밸이 아니라 워라블(워크-라이프 블랜딩)이 중요하다는 말도 있어요. 실리카겔에게는 일과 놀이가 구분되는 편인가요?
*일놀놀일 = '일하듯이 놀고 놀듯이 일하다'의 줄임말
한주: 저희는 저희가 재밌는 게 중요해요. 저 같은 경우는 이전에 했던 걸 반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새로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놀이처럼 느껴져요. 각자의 놀이 포인트가 모여서 실리카겔의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건재: 딱히 구분하지는 않고 ‘그냥 하지 뭐' 이런 느낌으로 하고 있는데요. 확실히 지금 준비 중인 앨범이나 단독 공연처럼 정신이 담겨야 하는 작업을 할 때는 우선순위로 두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 한주님은 isvn 에도 속해있고, 춘추님은 놀이도감이라는 1인 프로젝트도 하고 있어요.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하는 프로젝트와 경험이 실리카겔 밴드로서 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나요?
춘추: 확실히 있어요. 저희에게 실리카겔은 완전한 업이지만 최대한 취미답게 하는 게 중요해요. ‘이건 절대로 실패하면 안 돼!’라는 마음보다는 ‘이렇게 해도 웃길 것 같은데’라는 맥락으로 가고 싶어요. 너무 무겁지 않게 재미에 중점을 두지만,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것이 실리카겔의 작업 방식이에요. 혼자 진행해 본 프로젝트에서 ‘실리카겔에도 적용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밖에서 이것저것 해보고, 모여서 ‘이게 재밌더라’ 나누면서 뭔가를 또 만드는 작업이 이어집니다.
— 밖에서 쌓은 네트워크를 밴드 안으로 끌어온 적도 있으신가요?
건재: 굉장히 많아요. 혼자 진행한 작업도 다 경험이고 데이터니까요. 자연스럽게 밴드에도 좋은 자양분이 되죠.
한주: 실리카겔과 꾸준히 협업하는 작업자분들이 대체로 멤버들이 각자 유입시킨 분들이에요.
— 군대로 인한 공백기 이후에 Kyo181부터 실리카겔 시즌 2가 시작된 것 같아요. 공백기 전후로 실리카겔이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 있나요?
웅희:저는 수염이 났고요. (웃음) 공백기 동안 멤버들이 칼을 간 것 같아요. 무뎠던 칼이 날카로워진 채로 모이니까 밴드로서도 더 강해졌다고 느껴요. 저의 경우 당시에 다른 직업의 일을 하게 됐는데 너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실리카겔로서 하고 싶은 게 많은 열망으로 가득 찼던 시기였어요. 제가 뭘 했던 사람이었는지 절실하게 깨달았죠.
춘추: 군대를 다녀와서 실리카겔로 모이자는 목표가 명확했어요. 멤버들끼리 상의해서 군대도 비슷한 시기에 다녀온 거예요. 군대가 끝나면 다시 실리카겔을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그러면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생각해 보게 된 거죠. 각자 강해지는 시기가 있었어요.
Photo: Mario Chui(@69.chui)
— 실리카겔의 소개에 있는 새롭고 용감한 사운드(Brave New Sound)라는 말이 실리카겔의 작업 방식과도 연결이 되는 표현 같아요.
한주: 밴드 활동을 시작할 때 3호선 버터플라이에 성기완 선배가 보도자료에 작성해 주셨던 표현이에요. 안 그래도 음악을 다양하게 듣고, 새로운 음악이 나오면 체크하는 걸 좋아하는데 군대에서는 시간이 더 많잖아요. 예컨대 피치포크에 들어가서 새로 리뷰가 올라온 음반 10개를 다 듣곤 했어요. 그리고 군대는 어쩔 수 없이 케이팝을 많이 듣거든요. 사회 활동을 못 하게 된 만큼 음악을 더 경계 없이 흡수하면서 “음악적으로 이런 시도도 해볼 수 있겠다"라는 단서를 많이 얻었어요.
Kyo181부터 최근에 나온 Mercurial까지 제가 쓴 곡은 전부 군대에서 쓴 곡이에요. 실리카겔에 새로운 터치를 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왔고, 의도치 않게 예전부터 존재해 온 ‘Brave New Sound’라는 문장과 잘 어울리는 밴드가 된 것 같아요.
— 실리카겔이 생각하는 실리카겔의 다움은 무엇인가요?
웅희: 실리카겔다움이라… 설명하기 어려워요. 들려주고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아요.
건재: 뭔가를 규정짓고 정의한 상태로 진행한 적은 없었어요.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희의 색깔이 생겼어요.
한주: 저희의 색깔이 명확하다는 건 알겠는데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록 음악 베이스지만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고, 명쾌한 대답을 내리기가 어렵지만 이게 우리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세다는 반증 같아요.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니까요. 실리카겔은 실리카겔입니다.
협업을 통해
다양한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실리카겔의 세계관
— 이제 밴드 밖 동료들과의 협업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1집 앨범의 9를 연출할 때부터 Kyo181, NO PAIN, Mercurial 뮤직비디오까지 함께 작업해온 멜트미러 감독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한주: 당시에도 멜트미러는 시마 킴의 뮤직비디오로 비메오에서 스태프픽도 수상하고 유명했어요. 그분의 작품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언젠가 작업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정규 1집을 준비하면서 “9”의 뮤직비디오를 의뢰 드린 게 최초의 연결이었죠. 그 후로 대화를 나누고 차기 곡을 공유하면서 잘 통하다 보니까 작업을 하나씩 이어가며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멜트미러 감독이 좋은 이유는 너무 많지만, 절대적으로 실력이 너무 뛰어나세요.
멜트미러 감독과 처음으로 협업했던 뮤직비디오
[Official] 실리카겔 (Silica Gel) - 9
— 크레딧에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캐스트로 꾸린 분들도 재미난 분들이 많더라고요.
한주: 크레딧과 캐스트는 멜트미러 감독의 작업이라 저희가 소상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연출적인 부분으로 활용하는 것도 있는 것 같고요. 캐스트 같은 경우에는 전문 모델을 섭외할 수도 있겠지만,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수도 있고 음악가가 될 수도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실리카겔의 음악에 ‘작업자로서의 이해도’를 가지고 임할 수 있는 분들을 섭외하고 있어요.
— 멜트미러 감독 외에 지속적인 협업을 이어가는 분들은 누가 있나요?
춘추: 대표적으로 신재민 감독이 있어요. 음악을 만들고 지향점은 저희가 가져가지만,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엔지니어로서 여러 가지 기술적인 조언을 주세요. 저와는 대학 때부터 친분이 있었고, 저와 건재는 신재민 감독의 스튜디오 건물에 한 층을 같이 사용하고 있어요. 음반 작업할 때 위층에서 믹스해서 아래층으로 보내서 마스터링하는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져요. 앨범 작업과 공연 모두 같이 다니고 있고요.
웅희: 공연이든 음원이든 대중과 저희를 이어주는 브릿지 역할이죠. 저희 음악이 대중에게 가닿기 위해 신재민 감독을 거쳐서 가는 프로세스가 자리잡혔어요.
— 산산기어는 23 S/S 컬렉션으로 실리카겔의 Mercurial에서 영감을 받은 의류를 선보이고, Mercurial 뮤직비디오에는 전 캐스트가 산산기어를 입고 등장해요. 산산기어 팝업 때는 실리카겔이 공연을 했고요. 패션 브랜드와 밴드의 밀도 높은 콜라보가 인상 깊었습니다. 산산기어와의 협업은 어떻게 진행된 건가요?
한주: 산산기어는 멜트미러 감독, 신재민 감독과 같이 저희와 의상으로 고정적으로 협업해 온 크루 느낌의 브랜드예요. 단편적으로 의상으로만 협업하는 것 외에 묵직한 프로젝트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Mercurial이 탄생했어요. 패션 브랜드와 뮤지션이 협업한 적은 많지만, 더욱 긴밀하게 결합한 프로젝트로 아예 하나의 시즌 컬렉션을 드랍한 경우는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Mercurial 영상 후반부에 멤버들이 입고 있는 검은색 의상이 산산기어에서 각 멤버를 위해 특별히 제작해 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의상이에요. 이 자체로 의미 있고 기분이 좋았어요.
건재: 산산기어에 하나같이 재밌는 사람이 많아요.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의 작업을 존중하면서도 재미가 끊이지 않으니까 더 큰 시너지가 나오는 것 같아요.
산산기어와의 콜라보로 제작된 Mercurial 뮤직비디오
실리카겔 (Silica Gel) - Mercurial [M/V]
— 패션 브랜드부터 금융 브랜드까지 경계 없는 협업을 하는 것 같아요. 실리카겔이 외부 작업자와 협업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이 있나요?
춘추: 실리카겔의 밖에서는 저희도 다른 누군가와 협업하는 작업자니까요, 언제 작업이 즐거웠는지를 떠올려보게 돼요. 실리카겔로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는 밑으로 파고들면서 새로운 걸 찾는 걸 좋아해요. 저희와 고정적으로 함께 하는 작업자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멜트미러 감독, 신재민 감독, 산산기어, 사진작가 하태민. 똑같은 사람과 지속적인 협업을 한다고 해서 항상 똑같지 않거든요.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오히려 탄탄하고 밀도 있게 도전적인 작업이 가능해요. 결국 서로에 대한 리스펙과 신뢰가 중요해요. 일회성 협업이 아닌 계속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실리카겔의 친구들을 늘려나가고 있습니다.
— ‘Desert Eagle’은 카드 게임으로도 만들어졌어요. 노래가 TRPG 보드게임의 형태로 발전된 게 신기했는데요, 이건 어떻게 연결된 프로젝트예요? 보드게임을 만드는 과정이 꽤 까다롭지 않나요?
한주: 저희 넷 다 게임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Desert Eagle이 아니어도 저희 음악과 어울리는 게임을 내자는 막연한 아이디어는 있었어요. 이 카드 게임은 제가 isvn*이라는 팀에 속해있기 때문에 빠르게 현실화할 수 있었어요. 마침 그때 isvn 멤버들이 보드게임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isvn에는 실리카겔 뮤직비디오를 작업한 멜트미러 감독과 백윤석 감독도 멤버로 있어요. 실리카겔 음악으로 게임을 만들어도 재밌겠다는 아이디어를 던졌다가 두 분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프로젝트예요.
*isvn = 게임 혹은 게임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만드는 콜렉티브. 김한주, 멜트미러 감독, 백윤석 감독 등이 소속되어 있다.
웅희: 어떻게 보면 저희도 몰랐던 세상을 만들어주신 거죠.
Desert Eagle의 세계관을 담은 카드 게임
실리카겔 (Silica Gel) 'Desert Eagle' TRPG GAME : How to Play D.E Cross-space Congress
라이브 무대와 음악을
통한 연대와
앞으로의 계획
— 최근에 홍콩 클로켄플랍에서 첫 해외 공연을 하셨어요! 클로켄플랍 페스티벌 무대에 선 소감은 어땠나요?
춘추: 해외 팬들을 만나서 좋았고 클로켄플랍 자체는 재밌었지만, 우리의 다음 스텝으로 해야 할 일이 있겠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던 라이브 무대예요. 국내와 해외 관객들의 성향과 무대를 즐기는 방식이 다르더라고요. 실리카겔이 해외에서도 파이를 넓히기 위해서는 라이브적인 신경을 더 많이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앞으로 해외 투어 계획도 예정되어 있는 게 있나요?
건재: 아직은 없지만, 하고 싶어요. 앨범을 잘 만들어서 투어도 하고, 서사를 잘 만들어봐야죠.
— 공연을 해보고 싶은 나라나 무대는요? 유명 페스티벌도 좋고요. 이를테면 피치포크라던가…
웅희: 저는 호주요! 후지락에도 서보고 싶습니다.
한주: 남극 가서 한두 달 작업하고 오는 희망 사항이 하나 있고요. 피치포크… 너무 좋죠.
Photo: Mario Chui(@69.chui)
— 실리카켈이 주도하는 이벤트 시리즈 ‘신서사이즈(Syn.THE.Size)’는 첫 회 때 황소윤, Y2k92와 협업하고, 작년에는 오프라인에서 단독 공연으로 다양한 연주자들과 함께했어요. 신서사이즈는 어떤 기획의 공연인 건가요?
춘추: ‘신서사이즈’의 공연 이름은 ‘신시사이저' 악기에서 파생되었어요. 신시사이저는 실리카겔이 많이 사용하는 악기이기도 하고, 어떤 모듈을 이용해 전기 신호를 음악적인 형태로 합성해 출력하는 기기거든요. ‘신서사이즈’에 담긴 ‘합성’의 의미가 이 공연 시리즈의 핵심이에요.
1회 때는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에서 신시사이저 위주의 셋으로 공연했어요. 2회 때는 단순한 악기의 맥락을 넘어서 실리카겔과 다른 연주자, 프로듀서 친구들까지 신서사이즈(합성) 되어 더 큰 규모의 라이브를 하는 것이 목표였고요. 3회는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또 실리카겔이라는 모듈이 다른 무언가와 합성이 되는 형태로 이어 나가지 않을까 싶어요.
— ‘합성’이라는 키워드가 실리카겔의 협업 방식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실리카겔의 세계관과 어법이 다른 무엇과 합쳐졌을 때 어떻게 합성이 되길 바라나요? 그 합성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경험이나 메시지가 있나요?
건재: 우리가 마음에 드는 것을 만들고 어떻게 경험하는지는 소비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어요.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저희의 몫이겠죠?
춘추: 비단 관객들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작업자들과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싶어요. 완성도를 유지하면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하고, 저희의 작업을 통해 다른 친구들도 영감을 받아 어떤 움직임을 일으키길 바라요. 결과적으로는 서로 간의 작업을 응원하는 동료로서 함께 뭔가를 만들어 내는 그림을 그려요.
— NO PAIN 노션 페이지에 작업 과정부터 악보, 음원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어요. 스템파일 까지 들어있어서 팬들이나 다른 작업자들이 2차 창작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 같아요. 작업 과정을 기록하고 외부에도 공유하는 이유가 있나요?
한주: 이전에도 [SiO2.nH2O] EP로 리믹스 콘테스트를 열어서 스템 파일을 쫙 풀고 공유한 적이 있어요. 그때도 스템 파일을 푸는 것이 안전한 일일까를 고민했지만, 어차피 오픈 소스 라이브러리 대유행의 시대잖아요. 창작물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오픈 소스로 노출하는 것이 실리카겔의 자산 자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을 만들고 믹싱하는 우리의 스킬은 따라 할 수 없지만 그 결과물을 통해 나온 데이터는 외부와 공유하고 있다는 미묘한 지점도 재미있어요.
처음에 NO PAIN 발매 준비를 하면서 고등학교 밴드부 친구들이 커버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전방위 하게 프로듀싱이 가능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힙합이든 록이든 사람들이 갖고 놀 수 있게끔 오픈 소스로 푼 거죠. “실리카겔이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라는 NO PAIN의 가사처럼요.
춘추: 스파이더맨도 원작을 만든 사람은 따로 있지만 계속 나오는 스토리의 작가들은 전부 다른 사람이거든요. 스파이더맨 하나만 가지고도 많은 사람이 붙어서 새로운 에피소드와 거대한 세계관을 만들어 버리잖아요. 그런 식으로 NO PAIN이라는 조그마한 세계관의 디테일한 설정표를 푼 거죠. 저희의 공유를 통해 저마다의 창작과 독특한 트랙이 탄생하는 과정이 재밌어요. 초반에 얘기한 것처럼 저희는 노는 게 중요하니까 바깥사람들과도 같이 놀고 싶어서 이런 아이템 푸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이게 실리카겔스러운 것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들어요.
악보, 스템 파일, 미공개 사진 등 실리카겔의 NO PAIN 히스토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노션 페이지
— 실리카겔이 앞으로 더 협업해 보고 싶은 대상이 있나요? 어떤 협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이니 제약 없이 상상의 조합을 말씀해 주셔도 좋아요.
한주: 베토벤이요. (일동웃음)
건재: 그런 접근이면 음악 말고도 좀 더 독특한 대답을 내놓고 싶은데요. 뭐가 좋을까.
춘추: 닌텐도.
웅희: 항공 우주 산업? 아, 제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콩나물국밥집이 있어요. 시루향기 OST 만드는 게 들어온다면… (일동 웃음)
춘추: 브라이언 이노가 [Music for Airport]를 만든 것처럼 실리카겔도 [Music for 시루향기]를 만들 수 있죠.
한주: 시루향기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예전에 에마논이라는 파티 열었을 때 을밀대 주방장님에게 디제이를 가르쳐서 클럽으로 부르자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 실리카겔 협업에 경계가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웃음) 이어지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실리카겔에게 네트워크와 연대란?
웅희: 저희끼리 무언가를 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집단과 만나서 상상도 못 했던 일을 벌이는 게 재밌어요. 실리카겔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봐도 강점에 집중해 빠르게 뭉치고 협업할수록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제안이 들어와서 협업한 적도 있고, 저희가 먼저 손을 내밀어 협업한 적도 있지만, 결국은 함께 할 수 있는 재밌는 놀이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업하게 된 게 많아요.
한주: 실리카겔은 근본과 원리에 집중해 작업하지만 반대로 새로운 차원에서 진보하려고 노력하는 밴드예요. 음악적으로도 그렇지만 다양한 작업자들과 함께 실험적 시도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상반되어 보일 수도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는 저희의 특성을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건재: 사실은 혼자서 하는 일이 없잖아요. 전문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들과 만나면 내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영역에 드라이브를 걸어볼 수도 있고요. 의외의 연결과 작업자들 간의 연대를 통해 재밌는 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춘추: 협업은 규모를 키우고, 실리카겔이 할 수 있는 일을 확장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방식이에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베이스로 작업자와 작업자가 만나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재미있는 일들을 꾸준히 만들고 싶습니다.
하나의 대의를 향하는 ‘팀워크’보다
각자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팀플레이’
“시니컬한 상냥함. 뾰족하고 괴상하지만 짜릿하고 부드러운 위로.”
팬들이 남긴 감상평에는 유난히 상반된 단어가 공존한다.
한 마디로 규정짓긴 어렵지만 뚜렷한 해상도를 지닌 밴드 실리카겔은
자유롭게 개인 작업을 하면서 밴드로서는 더 단단하게 뭉친다.
군대로 인한 공백기 이후 새로운 팬들을 유입시키며 새 챕터를 열어가고 있는 이들은
최근에는 패션 브랜드 산산기어와 함께 아예 신곡인 ‘Mercurial’을 테마로 한 컬렉션을 드랍하며
새롭고 용감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팝업 스토어 앞에 수백 명을 줄 세우고, 4월 단독 공연 티켓을
1 초 만에 매진시키며 지금 가장 뜨겁게 주목받고 있는 밴드 실리카겔의 협업 방식을 들여다봤다.
마치 화학식 구조처럼 밴드라는 모듈에 경계와 한계 없이 다양한 작업자와 ‘합성’하며
밴드의 세계관을 넓혀나가는 과정에는 진중함과 경쾌함이 동시에 돋보였다.
Interview | 정혜윤 · 손꼽힌, Editㅣ정혜윤, Photo | Mario Chui(@69.chui)
실리카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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